작성일 : 25-08-24 08: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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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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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 후지산을 바라본 지도 올해로 3년째다. 일본 후지산 아래 작은 마을에서 일주일을 보내기 위해 겨우내 버티듯 일하고 돈을 번 것일지도 모르겠다. 만개했던 벚꽃이 지고 관광객이 서서히 빠져나간 4월 어느 오후, 가와구치 호수에 앉아 바라보는 후지산은 머나먼 꿈만 같았다. 닿을 듯 닿지 않는, 어느 날 돌연 사라져 보이지 않는, 그러다 또 갑자기 거짓말처럼 나타나 손짓하는 꿈 말이다. 머잖아 녹아 사라질 후지산 정상 하얀 눈 속에 나의 한 시절이 있었다.
해마다 특별한 마음으로 찾아가는 후지산이지만 올해는 간절함까지 더했다. 옵션만기일
‘인생 첫 100마일 트레일러닝 완주’라는 소기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였다. 난데없이 웬 100마일인가 궁금해하는 사람도 있겠으나, 그 계기가 아주 터무니없는 것은 아니었다. 트레일러닝에 입문한 지 10년 되던 지난해 여름, 몽블랑 알프스 일원을 달리는 울트라 트레일 몽블랑(UTMB: Ultra Trail Mont Blanc) 100㎞를 처음 완주했는데, 황금성용가리
운명처럼 매해 4월 후지산 일원에서 열리는 ‘후지산100’(Mt.Fuji100)의 100마일 부문 참가권을 얻은 것이다. 하늘이 준 기회라고 생각했다.
대회 참가 두번째 밤에 맞이한 후지산. 후지마키 쇼 제공
쉘라인 주식
후지산100’의 100마일 부문에 참가한 2500여명의 주자들. 이 대회 세 부문 중 100마일 부문 참가자가 가장 많다. 카즈 나가야스 제공
후지산100’의 100마일 부스톡웰
문에 참가한 2500여명의 주자들. 이 대회 세 부문 중 100마일 부문 참가자가 가장 많다. 이토 카오루 제공
후지산100’의 100마일 부문에 참가한 2500여명의 주자들. 이 대회 세 부문 중 100마일 부문 참가자가 가장 많다황금성게임
. 이토 카오루 제공
‘후지산100’은 이번 대회 참가자가 3800여명에 이를 정도로 일본 최대 트레일러닝 대회다. 2012년 처음 열렸다. 명칭대로 후지산 일원을 달리는 경기다. 경기 부문은 40㎞와 70㎞, 100마일로 나뉜다. 100마일은 160.934㎞다. 하지만 대회 때마다 마일 부문 완주 거리는 조금씩 달라진다. 이번 대회 100마일 부문 거리는 170㎞다. 지난해 이 대회 70㎞ 부문에 참가했었다. 자정에 출발해 밤새도록 산을 달려 도착한 아침은 예전 아침과 달랐다. 그 길 위에서 100마일 주자들을 만났다. 내게 주어진 길보다 두배는 긴 길을 걷고 달리는 그들을 보는 순간 가슴 깊은 곳에서 뜨거운 기운이 솟구쳤다.
1년이 흐른 지난 4월25일 오후 5시, 나는 드디어 ‘후지산100’ 100마일 경기 출발선에 서 있었다. 누적 상승고도는 약 8천m. 여태껏 출전한 그 어느 경기보다 무거운 배낭을 짊어지고 있었으나 이상하게도 마음은 가벼웠다. 걱정보다 도리어 설렌 이유는 100마일이라는 숫자가 좀처럼 가늠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25살에 인생 첫 산 지리산에 올랐던 때 기분과 비슷했다. 10년 전 처음 트레일러닝을 시작하던 때로 돌아간 것 같았다. 오로지 ‘완주’만이 목표였던 그때로 말이다.
100마일 경기임에도 출전자가 2500명을 웃돌기에 다섯개 그룹으로 나눠 15분 간격으로 출발했다. 나는 첫번째 그룹에 배정됐다. 수많은 인파 사이로 떠밀리듯 달려나갔다. 저 멀리 일본 트레일러너 친구 가나코와 아리카의 뒷모습이 보였으나 두 친구는 시야에서 성큼성큼 멀어졌다. 내 속도로 갈 수밖에 없었다. 입상을 목표로 달려나가는 저들의 무게가 짐작됐다. 출발과 동시에 한동안 숲 사이 임도를 달렸고, 아스팔트 길로 간신히 빠져나왔을 때 해는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한 여성 트레일러너가 건초로 뒤덮인 민둥산을 오르고 있다. 후지마키 쇼 제공
한 남성 트레일러너가 산길을 오르고 있다. 다키모토 유키히데 제공
한국 트레일러닝 대회는 물과 간식을 보급할 수 있는 체크포인트가 보통 10㎞ 간격으로 있기 마련인데, ‘후지산100’은 특이하게도 27㎞ 간격마다 있었다. 50㎞ 대회의 경우 우리나라는 체크포인트를 최소 4개 운영하는 반면, 이 대회는 단 2개만 운영했다. 물과 에너지 젤(대회 중 탄수화물과 카페인을 보충하는 젤 형태의 스포츠 식품)을 스스로 챙겨야 했기에 배낭이 무거워질 수밖에 없었다. 문제가 발생했다. 배가 고프면 체력적으로 지칠 것이라는 우려에 초반부터 너무 많은 양의 에너지 젤을 먹은 것이다.
그렇게 첫번째 고비가 찾아왔다. 두번째 체크포인트가 있는 50㎞ 지점에 도착했을 때 속이 메슥거리기 시작했다. 50㎞ 대회였으면 여기서 깔끔하게 끝났을 텐데, 남은 거리만 120㎞였다. 순간 100마일이라는 숫자가 완벽하게 체감됐다. 내 몸은 기가 막히게도 나에게 익숙한 거리를 기억하고 있었다. ‘야, 너 여기까지잖아. 무리하지 마.’ 포기할 것인가, 계속 갈 것인가. 엄청난 번뇌가 일어났으나 일단은 드롭백(신발과 옷을 교체할 수 있는 지점으로, 보통 100㎞ 이상 대회의 중간 지점에 설치한다)이 있는 100㎞까지만 가보기로 했다.
대회 참가자들이 잠시 물과 음료, 음식을 보급받을 수 있는 체크포인트. 밤을 꼬박 새워 달려야 하기에 체크포인트에서 충분히 충전해야 한다. 다키모토 유키히데 제공
대회 참가자들이 잠시 물과 음료, 음식을 보급받을 수 있는 체크포인트. 밤을 꼬박 새워 달려야 하기에 체크포인트에서 충분히 충전해야 한다. 다키모토 유키히데 제공
대회 참가자들이 잠시 물과 음료, 음식을 보급받을 수 있는 체크포인트. 밤을 꼬박 새워 달려야 하기에 체크포인트에서 충분히 충전해야 한다. 다키모토 유키히데 제공
어느덧 새벽을 거쳐 안개 사이로 동이 텄다. 산에서 하룻밤을 꼴딱 새웠다. 드롭백이 있는 100㎞ 지점까지 10㎞ 앞두고 있었다. 그 밤에 무슨 정신으로 여기까지 온 것일까. ‘걷는 것이 차라리 빠르겠다’ 싶은 수준으로 달려가고 있는데 뒤에서 어떤 여자가 “보영짱!” 하고 나를 불렀다. 놀라서 뒤돌아보니 10년 전, 사이타마현에서 열린 등산 교실에서 만난 이노우에였다. 당시 같은 여성이라 동질감이 컸던 기억이 있다. 배낭에 붙인 이름표를 보고 나를 알아본 것이었다. 세상에, 아직도 달리고 있다니! 쉰살이 넘은 그는 이번 경기가 자신의 29번째 100마일 경기라고 했다.
동행이 있다면 조금 더 힘내서 갈 수 있는 법. 이노우에의 갑작스러운 등장이 내심 반가웠으나 그는 나에게 조심히 오라고, 이따가 보자는 말을 남기고 총총히 앞서갔다. 그도 그만의 목표가 있을 것이다. ‘28번 100마일 경기를 완주하며 그는 얼마나 많이 웃고 울었을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100㎞ 지점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앞서 온 수많은 선수가 앉거나 누워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우선 목표한 100㎞까지는 도착했다. 더 갈지 말지는 천천히 고민하기로 하고 옷과 신발을 교체한 뒤 준비해둔 주먹밥과 찹쌀떡, 이온음료로 배를 채웠다.
밤을 새워 달리는 참가자들. 다카모토 유키히데 제공
초반 구간을 함께 달리는 참가자들. 다카모토 유키히데 제공
밤을 새워 달리는 참가자들. 다카모토 유키히데 제공
한 40분쯤 쉬었을까. 토할 듯 어지러웠던 속도 진정돼 있었고, 반쯤 굳어 있던 두 다리도 다시 갈 만한 상태가 됐다. 남은 거리를 헤아렸다. 70㎞. 사실 어느 쪽도 마땅치 않았다. 더 가기에는 부담스러운 거리였고, 여기서 그만두자니 지나치게 많이 와버렸다. 그때 유카리를 만났다. 유카리는 지난해 이 경기에서 준우승을 차지한 실력파 선수다. 이 시간에 여기에 있을 리가 없는데 어떻게 된 일인지 물으니 몸이 좋지 않아 기권할 생각으로 2시간을 쉬었다고 했다. 유카리 역시 나와 같은 고민을 하고 있었다.
그 순간, 우리는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서로에게 말했다. 조금 더 가보자고 말이다. 밑져야 본전이었다. 아직 많은 선수가 이곳으로 달려오는 중이었고, 경기는 끝나지 않았다. 무엇보다 여기서 포기하면 두번 다시 100마일 경기에 도전하지 못할 것만 같았다. 그것이 가장 두려웠다. 더 가보기로 선택한 데는 유카리의 영향이 컸다. 내가 만약 유카리였다면 진즉 기권했을 것이다. 원하는 대로 경기를 풀지 못할 때 나는 종종 경기를 포기했다. 원하는 모습과 결과로 완주하는 것만이 내가 원하는 경기였다.
100마일 부문의 최대 적은 잠이다. 이토 카오루 제공
잠과 사투를 벌이는 참가자. 다카모토 유키히데 제공
하지만 원하는 대로 달릴 수 없다는 것을 이제는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그 길 위에서 들었다. 처절하게 걷고 걷는 그 긴 시간조차도 나의 경기라는 것. 그 시간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렇게 그 시간을 스스로 넘지 않으면 앞으로 어디로도 나아갈 수 없다는 것을 말이다. 그렇게 마음을 바꾸니 다시 달리고 싶어졌다. 새롭게 나의 길을 만들고 싶었다. 함께 가자는 유카리를 먼저 보내고 나의 속도로 다시 출발했다. 어쩌면 이제부터가 진짜 경기라는 생각도 들었다.
남은 70㎞는 지난해 출전한 70㎞ 부문과 코스가 같아 친근했다. 1년 전 생각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하지만 기억은 때때로 심각하게 왜곡되기도 한다. 그때는 분명 수월하게 넘었다고 생각한 산이었는데 넘고 넘어도 끝이 보이지 않았다. 어느새 저녁이 오고 산에는 땅거미가 내렸다. 두번째 밤이었다. 출발한 지 어느덧 30시간을 지나고 있었다. 30시간은 내심 기대했던 완주 기록이었다. 하지만 산속에 여전히 있으니 자괴감이 들었다. 한국에 있는 친구에게 전화해 그 자리에 주저앉아 펑펑 울고 말았다.
내 힘으로 도무지 어쩔 수 없는 고통은 갈증도, 배고픔도, 추위도 아니었다. 바로 ‘잠’이었다. 밀려오는 잠을 통제할 수가 없었다. 140㎞ 지점에 마련된 체크포인트의 작은 화로 곁에 쪼그려 앉아 30분가량 눈을 붙였다. 그래도 남은 잠을 주체할 수가 없어서 걸어가는 중에도 잠을 잤고 급기야 산길 옆에 쓰러진 채로 얼마간 잠들다 다시 걷기를 반복했다. 속도가 현저히 떨어진 통에 땀이 마르니 춥지도 않았다. 100마일까지 겨우 10㎞를 남긴 마지막 산에서는 무려 3시간을 유령처럼 배회했다. 어느덧 날이 밝았다. 산에서 맞이한 두번째 아침이었다.
대회 100마일 부문 우승자 에콰도로의 호아킨 로페즈 선수. 17시간48분40초 기록으로 완주했다. 나카가와라 리에이 제공
‘후지산100’ 대회의 맛 중 하나는 별이 보이는 고요한 밤에 달리는 것이다. 후지마키 쇼 제공
이윽고 출발한 지 37시간19분이 지난 4월27일 일요일 아침 6시19분, 그렇게 나는 인생 첫 100마일 트레일러닝 경기에 도전해 완주했다. 목표보단 한참 뒤늦은 시간이었으나 중요한 것은 오직 내 두 다리로 출발지에서 100마일 떨어진 곳에 도착했다는 단 하나의 사실이었다. 100마일 경기를 완주하고 나서 달라진 점이 있다면 모든 일에는 결국 ‘끝’이 있다는 것을 온전히 믿게 됐다는 것이다. 아무리 힘들고 괴롭고 아프고 슬픈 일이 일어나더라도 말이다.
글 장보영 ‘아무튼, 산’ 저자, 사진 장보영, ‘후지산100’ 주최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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