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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성씨6회 김해김씨
 
김씨의 시조는 정말 김수로, 김알지일까? 투후 김일제와 김씨
 
 

 

마지막으로 살펴 볼 것은 수로왕의 성인 김씨와 관련된 것입니다. 현재 한국에서 가장 많은 인구를 자랑하는 큰 성씨(姓氏)가 김해 김씨(金海 金氏)입니다. 그 유래를 알아 볼 수 있는 『삼국유사』 가락국기와 왕력(王曆)의 내용은 각각 다음과 같습니다.

거등왕(居登王)은 아버지가 수로왕이고 어머니는 허왕후이다. 개황력(開皇曆)에는 성이 김씨이니 대개 나라의 세조가 금란(金卵)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수로왕은 임인 3월에 알에서 태어나 이 달에 즉위하여 158년간 나라를 다스렸다. 금란에서 났으므로 성을 김씨라 하니 개황력에 실려있다.

이 두 글에서는 수로가 금알에서 났기 때문에 김씨가 되었다고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삼국사기』 김유신 열전에는 이와는 사뭇 다른 내용이 보입니다.

신라 사람들이 스스로 소호금천씨(少昊金天氏)의 후손이라고 하여 金으로 성을 삼았고 유신의 비문에도 헌원(軒轅)의 후예요 소호(少昊)의 직계라고 하였으니 남가야(南加耶)의 시조 수로는 신라와 동일한 성씨이다.

중국의 ‘소호금천씨설’을 채용하여 신성성과 유구성을 강조한 것입니다. 개황력은 가야 멸망 이후 편찬된 것이고, 『김유신비문』 역시 7세기 후반에 건립된 것으로 보아 두 가지 기원설 모두 가야 당대에 이루어진 것은 아닌 듯합니다. 그러나 적어도 7세기 중반 이전에는 신라왕족과 마찬가지로 김씨성(金氏姓)이 칭해졌던 것으로 보입니다.

<백승충>

 

현재까지 남아있는 자료에서 가락국 당대의 인물들은 『삼국유사』에 주로 왕실세계(王室世系)를 중심으로 그 행적이 남아 있습니다. 물론 다른 기록에서 가야의 인물이 확인되기는 하지만 삼국유사와 같은 구체적인 내용은 확인되지 않습니다.



가락국은 기원 42년부터 532년까지 10대에 걸치는 왕들이 490년간 김해지역에서 세력을 영위하였다고 합니다. 이를 정리하면 아래와 같습니다.

시조(始祖)는 수로왕(首露王)인데, 42년 3월 알에서 태어나 즉위하여 이후 158년간 나라를 다스렸습니다. 금빛 알에서 나왔으므로 성이 김씨였고 왕비는 허왕후(許王后)입니다. 김수로왕은 석탈해로부터 왕권을 도전 받기도 하였으나 이를 술법으로써 물리쳤으며 신라 파사왕의 요청에 따라 음즙벌국과 실직곡국 간의 분쟁을 조정해주기도 하였습니다.

2대 거등왕(居登王)은 수로왕과 허왕후의 아들입니다. 199년에 즉위해서 55년간 나라를 다스렸으며, 왕비는 허왕후를 따라온 천부경(泉府卿) 신보(申輔)의 딸 모정부인(慕貞夫人)입니다.

3대 마품왕(麻品王)은 259년에 즉위하였고, 왕비는 종정감(宗正監) 조광(趙匡)의 딸 호구부인(好仇夫人)입니다.

4대 거질미왕(居叱彌王) 또는 금물(今勿)은 291년에 즉위하였고, 왕비는 아궁(阿躬) 아간의 손녀 아지부인(阿志夫人)입니다.

5대 이품왕(伊品王)은 346년에 즉위하였고, 왕비는 사농경(司農卿) 극충(克忠)의 딸 정신부인(貞信夫人)입니다.

6대 좌지왕(坐知王) 또는 김질왕(金叱王)은 407년에 즉위하였고, 왕비는 도령(道寧) 대아간의 딸 복수부인(福壽夫人)입니다. 왕이 처음에 종살이하던 여자[傭女]에게 장가들었는데 그 여자의 무리를 벼슬에 두게 되니 나라가 어지러웠습니다. 이때 신라가 꾀로서 가락국을 치려하니 박원도(朴元道)란 신하가 왕에게 간했습니다. “점괘에 의하면 소인을 제거하면 군자(君子)인 벗이 와서 합심할 것입니다.” 이에 왕은 사과하고 종살이하던 여자를 하산도(荷山島)로 귀양보내고 선정을 베풀어 백성을 편안하게 했습니다.

7대 취희왕(吹希王) 혹은 김희(金喜)는 421년에 즉위하였고, 왕비는 진은(眞恩) 각간의 딸 인덕부인(仁德夫人)입니다.

8대 질지왕 혹은 김질은 451년에 즉위하였고, 왕비는 김상(金相) 사간의 딸 방원부인(邦媛夫人)입니다. 452년 허왕후의 명복을 빌기 위해 왕후가 수로왕과 결혼한 곳에 왕후사(王后寺)를 세우고 밭 10결(結)을 바쳤습니다.

9대 겸지왕(鉗知王) 혹은 김겸왕(金鉗王)은 492년에 즉위하였고, 왕비는 출충(出忠) 각간의 딸 숙부인(淑夫人)입니다.




10대 구형왕(仇衡王) 혹는 구해왕(仇亥王)은 521년에 즉위하였고, 왕비는 분질수(分叱水) 이질의 딸 계화부인(桂花夫人)입니다. 532년 탈지(脫知) 이질금을 나라에 남겨두고 왕자와 장손 졸지공(卒支公)과 함께 항복해 신라로 들어갔습니다. 그의 아들로는 세종(世宗) 각간, 무도(茂刀) 각간, 무득(茂得) 각간이 있습니다.

<백승충>


 

 


【서울=뉴시스】 이수지 기자 =국립중앙박물관이 12월3일 열리는 특별전 '가야 본성-칼과 현'에서 파사석탑(婆娑石塔)을 일반에
공개한다라며 16일 김해 수로왕비릉에서 고유제를 지냈다고 17일 밝혔다. 파사석탑. (사진=국립중앙박물관 제공) 2019.10.17.
suejeeq@newsis.com

 


【서울=뉴시스】 이수지 기자 =국립중앙박물관이 12월 3일 열리는 특별전 '가야 본성-칼과 현'에서 파사석탑(婆娑石塔)을 일반에
공개한다라며 16일 김해 수로왕비릉에서 고유제를 지냈다고 17일 밝혔다. 고유제 현장. (사진=국립중앙박물관 제공)
2019.10.17.suejeeq@newsis.com

 

 

문화재자료 제227호로 지정된 '파사석탑'과 관련해 '삼국유사'에는 48년 7월 허황옥이 무서운 파도를 잠재우기 위해 파사석(婆娑石)을 배에 싣고 김해로 왔다는 기록이 있다. 이 탑은 원래 바다를 항해할 때 배의 균형을 잡으려고 배 바닥에 실었던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원래 이 탑은 호계사(虎溪寺)에 있었다. 절이 폐사된 뒤 김해부사 정현석이 지금의 수로왕비릉 앞으로 옮겼다고 전한다.

국립중앙박물관은 파사석탑 보존처리 방법을 정하기 위해 국립김해박물관과 고려대학교 산학협력단과 이 탑의 과학적 분석을 했다.

그 결과, 파사석탑은 엽납석을 함유한 석영질 사암이며 사암 결 또는 균열 부위에 마그마 활동이 남긴 산화철 광물이 불규칙적으로 포함된 것으로 나타났다. 탑 재질이 엽납석을 함유한 퇴적암 계열의 암석으로 결론이 나면서 원산지 분석이 급선무로 떠올랐다.

박물관은 "이 암석은 지금까지 한반도 남부에 존재하지 않아 '삼국유사'에 전하는 파사석의 이동 경로를 확인하는 작업이 규명돼야 할 것"이라며 "이와 관련해서 향후 인도 아유타국을 비롯한 남방 아시아 해안을 중심으로 분포하는 석재와 비교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김해 김씨(金海金氏) 연원

한국의 김(金)씨는 신라계(알지계)와 가야계(수로계)로 나뉜다. 김(金)씨는 한국에서 가장 많은 인구를 가진 성씨(姓氏)이다. 2000년 주택인구조사에 따르면 전체 인구의 21.6%를 차지하고 있으며, 지난해(2010년) 조사된 인구는 1072만명이다. 그중 신라계 김씨가 약 600만명이 넘고, 가야계인 김해김씨가 420만명(2000년 인구센서스에선 412만명)이다.

그 외 김씨 중에서 신라계도 가야계도 아닌 김씨가 있다. 이름하여 사성김해김씨다. 사성김해김씨는 임진왜란 당시 조선으로 귀화한 가등청정(加藤淸正)의 우선봉장 사야가(김충선)와 부장 사여모(김성인)를 시조로 하는 씨족이다. 약 20만명으로 파악되는 이들은 조선왕조에서 북방 경계를 맡겼기 때문에 북쪽에 많이 살고 있고, 남쪽에는 대구시 달성군 가창면 우록리에 집성촌을 형성하고 있어 우록김씨라고도 하고, 경북 청도군 이서면 구라동리에 집성촌을 형성하고 있어 구라동김씨라고도 한다.

◆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성관, 김해김씨(金海金氏)

김해김씨는 한자식 성으로는 우리나라에서 제일 오래된 성씨 중 하나다. 삼국유사의 가락국기에 따르면 가야의 수로왕 탄생연대가 서기 42년으로 되어 있으니, 서기 65년 신라계 김씨의 시조인 대보공 알지의 탄생연도보다 23년이 빠르다. 따라서 삼국유사의 기록에 따르면 김해김씨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성씨가 되는 것이다.

물론 한씨나 기씨, 선우씨 등에서는 고조선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 조상을 언급하기도 한다. 예를 들면 조선 준왕의 세 아들이 삼한의 왕이 되었고, 그들이 자신의 시조라는 것이다. 그리고 중국의 ‘요양고씨’나 국내 ‘횡성고씨’ 등 고씨의 일부에서는 자신들의 성관이 ‘제주고씨’가 아니라, 고구려의 고씨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 같은 주장은 역사적으로 고증할 수 있는 것이 없어서 신빙성을 부여하기 힘들다.

또 한자식 성씨를 쓴 것은 고구려에서는 장수왕 때, 백제에서는 근초고왕 때이기 때문에 근초고왕의 여씨(余)가 가장 먼저이고, 두 번째가 장수왕의 고(高)씨라고 주장하는 이도 있다. 그런 주장도 어느 정도 일리가 있지만, 현재 고구려의 고(高)씨와 백제의 여(余)씨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가장 오래되었다고 할 수가 없다.

다른 한편 김씨라는 성을 쓴 것은 진흥왕 때부터이기 때문에 김해김씨가 가장 오래되었다고 할 수 없다는 주장이다. 즉 가야의 왕족에게 김씨의 성을 함께 쓸 수 있도록 부여한 것은 신라의 왕족이었기 때문에 가장 오래된 성씨는 신라계 김씨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또 수로왕의 재위기간이 158년이라는 것과 가야국이 신라에 병합된 532년(법흥왕 18년)까지의 왕이 10명에 불과할 수가 없다(평균 한 명의 왕 재위기간이 49년)는 지적이다. 따라서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성관은 김해김씨가 아니라, 경주김씨라는 주장이다.

하지만 이 같은 주장들은 중국사서나 역사적 사실에 비추어 추론하는 것이지, 역사적 근거는 없다. 따라서 삼국유사의 가락국기에서 시조로 언급된 수로왕의 탄생연대를 김해김씨의 ‘시작’으로 본다면, 김해김씨를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성씨라고 할 수밖에 없다.

◆ 김해김씨의 연혁과 갈래

삼국유사에서는 수로왕의 성씨를 김씨로 한 것에 대해 “수로왕이 금함에서 나왔기 때문에 ‘김씨’ 성을 쓰게 되었다”고 했다. 왕위에 오른 수로왕은 인도의 아유타국에서 온 공주 허황옥(許皇玉)을 왕비로 맞았는데, 수로왕과 왕비 슬하에 10남2녀를 두었다. 그중 태자를 통해 김씨 성을 잇게 하고, 다른 두 왕자에게 허씨 성을 주어 모후의 성을 계승케 했다. 그리고 나머지 7왕자는 출가하여 하동칠불이 되었다고 한다.

현재 가야계 성씨는 김해김씨와 김해허씨(許氏), 김해허씨에서 갈라져 나온 하양허씨, 양천허씨가 있다. 그리고 당나라로 갔다가 중국 황제로부터 이씨(李氏) 성을 하사받은 고려 현종 때의 상서좌복야 이허겸을 시조로 하는 인천이씨, 양산이씨가 있다. 따라서 김해김씨, 김해허씨, 양천허씨, 하양허씨, 인천이씨, 양산이씨는 수로왕을 시조로 삼는 동조동본(이본)이성이라고 할 수 있다.

김해김씨는 중시조 김유신 이후 148개 파로 나뉘어졌다. 그중 경파(卿派), 사군파(四君派), 삼현파(三賢派), 그리고 문경공파(文敬公派)가 가장 많다.

경파는 김유신의 직계손인 김목경(金牧卿)이 고려 충정왕 때 조적의 난을 평정하는 데 공을 세워 김녕군(金寧君)에 봉해지면서 생겨났다. 사군파는 목경의 아우 김익경(金益卿)을 중조로 하는 파로 고려 말에 예의판서, 대제학에 오른 김진문(金振門)과 조선시대 이괄의 난을 평정하는 데 공을 세운 김완(金完)이 유명하다. 그리고 삼현파는 김관(金管)을 중조로 하는 파로 김종직의 문하생으로 무오사화 때 참수당한 김일손(金馹孫)과 삼현의 한 사람인 김대유(金大有)가 유명하다.

하지만 김해김씨에 대한 논란도 없지 않다. 즉 한자식 성을 쓰지 않았던 가야시대에 김씨(金氏)와 허씨(許氏)를 나누어 쓰게 되었다는 기록을 믿을 수 있는가이다. 또 인도 아유타국에서 온 공주가 한자식 성명인 허황옥이라는 이름을 썼다는 것도 믿기지 않는다. 그리고 불교 전래가 한참 후의 일인데도 7왕자가 출가를 하여 성불하였다는 주장은 인정하기 어렵다.

하지만 김해김씨 일족이 신라와 고려조를 지나면서 일부가 허씨 성을 얻거나 이씨 성으로 변성했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 역사적 부침(浮沈)이 심했던 김해김씨

김해김씨는 우리나라 역사에서 부침이 많았던 성씨 중의 하나이다. 가야의 왕족으로 출발해서 신라에 병합된 후 무력, 서현, 유신 3대에 걸쳐 혁혁한 공을 세움으로써 삼국통일을 이룩한 일등공신이 되었다. 그래서 김유신은 흥무대왕에 추존되기까지 한다.

하지만 통일신라 하대에는 신라계 김씨의 차별에 서러움을 겪어야 했다. 삼국사기 기이편(紀異篇)에는 [혜공왕 15년 4월, 김유신의 무덤에서 갑자기 바람이 일어 미추왕릉으로 불어갔다. 얼마 뒤 무덤이 진동하며 김유신 혼령이 호소하는 소리가 들렸다. “신은 삼국을 통일하고 죽어서도 나라를 지키려는 마음은 변함이 없는데, 지난 경술년 신의 자손들이 죄 없이 죽임을 당하였으니, 이는 군신이 저의 공렬을 잊음이라, 다시는 나라를 위해 애쓰지 않겠습니다”고 말해 미추왕의 혼령이 ‘대의가 더 중요하다’고 설득하자, 김유신 혼령은 다시 회오리바람이 되어 무덤으로 돌아갔다]고 기록하고 있다.

여기서 미추왕은 신라계 김씨를 상징하는 것이고, 김유신은 가야계 김씨를 상징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일이 있은 후 혜공왕은 김경신(金敬臣)을 김유신의 무덤에 보내 대신 사과하고, 공덕보전을 취선사에 내려 김유신의 명복을 빌게 했다고 한다.

그 후 고려시대에 들어와 김해김씨는 많은 문무명신을 배출했다. 고려시대에만도 정승급 15명과 명신 공신 10여명과 장군 8명, 제학(提學) 11명을 배출하여 위세를 떨쳤다. 그래서 김해김씨는 삼한 갑족의 하나로 명성을 드높였다.

하지만 조선시대에 들어와 김해김씨 가문은 부진을 면치 못하였다. 역대 정승에서도 숙종조의 김우항(金宇抗) 한 사람뿐이었다. 삼한 갑족으로 명성을 떨치던 김해김씨 문중이 조선시대 쇠락을 면치 못한 것은 무오사화 등 많은 정치적 사건에 휘말렸기 때문으로 보인다.

하지만 근대 이후 인구가 가장 많은 성관답게 수많은 인물들이 배출되고 있다. 특히 조선 말기나 일제 강점기보다 대한민국 건국 이후 시간이 가면 갈수록 정관계는 물론 재계에 이르기까지 두드러진 인물들이 많이 나오고 있다.

◆ 김해김씨(金海金氏)의 인물들

김해김씨의 인물로는 수로왕을 비롯한 가야의 10왕이 있다. 수로왕-도왕-성왕-덕왕-명왕-신왕-혜왕-장왕-숙왕-양왕(구형왕)이 그들이다. 구형왕의 아들은 3명이 있었는데, 첫째가 세종이고, 둘째가 무득, 셋째가 무력이다. 그중 무력은 신라의 각간을 역임하고 혁혁한 무공을 세웠는데, 그 아들이 서현(舒玄)이고, 손자가 유신이다.

김유신(金庾信)은 김해김씨의 중시조인데, 동생을 태종무열왕 김춘추(金春秋)에게 시집보내고, 그의 딸(지소부인)을 부인으로 맞았다. 성골에서 왕위를 이을 사람이 없자, 매부인 김춘추를 태종무열왕에 세웠으며, 태종무열왕·문무왕와 함께 삼국통일의 대업을 달성했다. 그 후 42대 흥덕왕에 이르러 흥무대왕(興武大王)으로 추존되었다. 동생 흠순(흠춘)은 문무왕 대에 백제 부흥군을 격파하였으며, 당나라 군사와 함께 고구려를 정벌할 때 대당총관이 되어 큰 공을 세우고 각간이 되어 나라를 평안케 했다.

김일손(金馹孫)은 조선 성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춘추관이 되어 ‘성종실록(成宗實錄)’의 사초를 썼다. 하지만 전라도 관찰사로 재직 중이던 이극돈의 비행을 직필하고, 상소하여 원한을 샀다. 그러다가 세조의 왕위찬탈을 규탄하는 김종직의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성종실록(成宗實錄)’에 실었다가 이극돈·유자광 등 훈구파의 모함을 받았다. 그로 인해 발생한 무오사화로 스승 김종직은 부관참시(剖棺斬屍) 당하고, 김일손은 참수(斬首)되었다. 중종반정 이후 신원되어 도승지에 추증되고, 목천의 도동서원과 청도의 자계서원에 배향되었다.

김홍도(金弘道)는 도화서 화원이 된 후 왕세손의 초상화를 그렸으며, 어진화사(御眞畵師)로 정조를 그렸다. 왕명으로 용주사의 ‘부모은중경(父母恩重經)’ 삽화로 판화를 그렸다. 풍속화를 많이 그렸으며, 조선의 3대 화가로 이름을 날렸다.

김대건(金大建)은 우리나라 최초의 천주교 신부(神父)이다. 세례명은 안드레이고, 아버지는 기해사옥 때 순교하였다. 프랑스 신부 모방에게 영세받고 마카오의 파리 외방전교회에서 신학을 공부하다가 필리핀으로 건너가 매스트르 신부 문하에서 신학과 철학을 연구했다. 천주교 박해에도 불구하고 귀국하여 교세 확장에 진력하다가 1845년 상하이에 가서 한국인 최초로 신부직을 받았다. 그 후 청나라 선교부와의 통신연락에 필요한 비밀 항로를 개척하기 위해 답사하다가 체포되어 25세 나이로 사형을 당해 순교하였다.

김대중(金大中)은 김해김씨 경파의 한 갈래인 안경공파의 사람으로 대한민국 제15대 대통령이 되었다. 국회의원 장택상의 비서로 정계에 입문한 후 1960년 민의원, 6·7·8·13대 국회의원이 되었다. 1971·1987·1991년에는 신민당·평민당·민주당의 대통령 후보가 되었으나 낙선했다. 1997년에는 김종필 총재가 이끄는 자민련과 후보단일화에 성공하여 15대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했다. 집권 후 국가의 외환위기를 극복하고 경제를 안정시키기 위해 노력했으며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과의 남북정상회담, 6·15남북공동선언을 이끌어내어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이외에도 김해김씨 문중에는 김종필(金種泌) 전 총리(전 자민련 총재)와 김형오(金炯旿) 전 국회의장을 비롯해 김기춘(전 법무부장관), 김성기(전 법무부장관), 김근수(전 국가보훈처장, 전 국회의원), 김상현(전 국회의원), 김성곤(전 국회의원, 쌍용그룹 창업주), 김영배(전 국회의원), 김용갑(전 국회의원), 김무성(국회의원, 전 한나라당 원내총무), 김부겸(국회의원), 김홍신(소설가, 전 국회의원), 김형욱(전 중앙정보부장), 김혁규(전 국회의원, 경남지사), 김중권(전 대통령 비서실장), 김종곤(전 해군참모총장, 전 국회의원), 김정길(전 행자부장관, 전 국회의원) 등 걸출한 인물들이 많이 있다.

 

 

인천 이씨(仁川李氏)의 연원

인천 이씨(仁川李氏)의 선계(先系)는 김해 김씨(金海金氏)의 시조(始祖)인 가락국(駕洛國) 수로왕(首露王)의 후예로 전하며, 수로왕의 장자(長子) 계통은 김해 김씨이고, 차자(次子)는 어머니인 허황후(許皇后)의 성을 이어받아 허씨가 되었는데, 인천 이씨는 바로 허씨에서 갈린 분적종(分籍宗)으로 경원 이씨(慶源李氏) 또는 인주 이씨(仁州李氏)로도 불렸다.

신라 경덕왕 14년(755년) 허황후(許皇后)의 23세손인 아찬(阿飡ㆍ신라 17관등 중 6번째 관등) 허기(許奇)가 신라 사신으로 당(唐)나라에 갔을 때 그해 11月에 안록산(安祿山)의 난이 발생하여 현종(玄宗)이 756년 촉(蜀)으로 피난하게 되었다. 그때 허기(許奇)는 위험을 무릅쓰고 현종을 호종(扈從)하였으며, 757년 난이 평정되어 현종이 도성으로 돌아와서 이를 가상히 여겨 시서(詩書)와 황제의 성(姓)인 이씨(李氏)를 사성(賜姓)하였다. 758年 허기(許奇)가 신라로 환국하자 신라 경덕왕은 그 공을 기려 소성백(邵城伯)의 작위(爵位)와 식읍(食邑) 1,500호를 봉하여 세습케 하였으며, 이로서 허씨(許氏)에서 이씨(李氏)가 되었으므로 인천 이씨 문중에서는 이허기(李許奇)를 득성조(得姓祖)라 한다.

허기(許奇)의 후손으로 허선문(許宣文ㆍ양천 허씨의 시조)과 허사문(許士文ㆍ태인 허씨 시조로 허선문의 아우로 추측, 인천 이씨의 족보에는 허준으로 나타남)이 있었다. 허사문(許士文)은 수로왕비 보주태후의 30세손으로 태조 왕건의 딸과 결혼하여 허즙(許楫ㆍ집이라고도 읽음)과 허도(許棹ㆍ이허겸)을 낳았는데, 형인 허즙(許楫)은 태인 허씨를 잇고, 동생인 허도(許棹)는 이허겸(李許謙)으로 인천 이씨의 시조가 되었다.


▲ 인천광역시 연수구 연수동에 자리한 시조 이허겸(李許謙)의 묘.

득성조(得姓祖) 이허기(李許奇)의 10세손으로 고려 현종(顯宗) 때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를 지낸 이허겸(李許謙)에게는 2남 1녀가 있었는데 그의 딸이 김은부(金殷傅)에게 시집가서 세 딸을 낳았고, 이 세 딸이 모두 현종(顯宗)의 비(妃)가 되었다. 김은부(金殷傅)가 외척이 되면서 이허겸(李許謙) 또한 그의 인척인 관계로 왕실과의 인척이 되었고, 현종 15년(1024년) 왕의 처외조부인 이허겸(李許謙)은 ‘상서우복야 상주국 소성현개국후 식읍일천구백오십호(尙書右僕射上柱國邵城縣開國侯食邑一千九百五十戶)’에 증직되었다


▲ 이허겸(李許謙)의 묘 앞에 세운 묘려(墓閭)인 원인재(源仁齋ㆍ인천문화재자료 제5호). 묘려의 명칭을 원인재라고 한 것은 인천이 인천 이씨 각 파의 근원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인천 이씨가 고려 중엽에 왕실과의 척연(戚緣)을 배경으로 크게 세력을 떨쳤는데, 그 중추적 인물은 이허겸(李許謙)의 손자인 자연(子淵)이다. 자연(子淵ㆍ1003∼1061)은 자는 약충(若沖)으로 상서좌복야(尙書右僕射) 한(翰)의 아들이다. 현종 15년(1024년) 문과에 급제하여 덕종 즉위년(1031년) 우보궐(右補闕)ㆍ이부낭중(吏部郞中)ㆍ어사잡단(御史雜端)ㆍ우승선(右承宣)이 되고, 정종(靖宗) 때 급사중(給事中)ㆍ중추원지사(中樞院知事)를 거쳐 문종 1년(1047년) 이부상서(吏部尙書)ㆍ참지정사(參知政事)를 거쳐 1050년 내사시랑평장사(內史侍郞平章事)가 되었다.

1052년 세 딸이 문종에게 시집을 가 인예태후(仁睿太后)ㆍ인경현비(仁敬賢妃)ㆍ인절현비(仁節賢妃)가 되었으며, 특히 인예태후가 순종(純宗)ㆍ선종(宣宗)ㆍ숙종(肅宗)을 낳음으로써 왕실과 밀접한 관계를 맺게 되어 인천 이씨가 고려의 최고 문벌로 성장하는 기틀을 마련하였다. 1052년 수태위(守太尉)를 거쳐 그 뒤 추성좌세보사공신(推誠佐世保社功臣)에 봉해졌으며, 개부의동삼사수태사(開府儀同三司守太師) 겸 중서령감수국사상주국경원군개국공(中書令監修國史上柱國慶源郡開國公)에 이르렀다. 문종 묘정에 배향되었으며, 시호는 장화(章和).


▲ 1530년 왕명으로 펴낸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기록된 인천 이씨 인명록. ??

자연(子淵)의 장남 호(顥)의 딸이 12대 순종(純宗)의 비(妃)가 되었고, 2남 정(?ㆍ1024~1077)의 딸이 13대 선종(宣宗)의 비(元禧宮妃)가 되었다. 그리고 호(顥)의 아들인 자겸(資謙)의 딸들이 예종(睿宗)과 인종(仁宗)의 비가 되는 등 왕실과 척연(戚緣)을 맺음으로써 그 가문의 세력은 절정에 달하였다. 그러나 자겸(資謙)이 인종(仁宗)의 장인으로 권세를 전횡한 끝에 난을 일으켰다가 세 아들과 함께 숙청당함으로써 이들의 권세는 종지부를 찍었다.

 

자겸(資謙ㆍ?~1126)은 음서(蔭敍)로 합문지후(閤門祗候)에 임명되었으나 누이동생인 순종비의 부정사건과 관련하여 면직되었다. 예종 3년(1108년) 둘째 딸이 예종(睿宗)의 비가 되자 개부의 동삼사 수사도 중서시랑 동중서문하평장사(開府儀同三司守司徒中書侍郎同中書門下平章事)가 되었고, 곧 이어 소성군 개국백(邵城郡開國伯)에 봉해졌다. 1122년 예종이 죽자 왕위를 탐내던 왕제들을 물리치고 연소한 외손자인 인종(仁宗)을 왕위에 오르게 하여 협모안사공신 수태사 중서령 소성후(協謀安社功臣守太師中書令邵城侯)에 책봉되어 최고의 지위에 올랐다.

같은 해 왕의 숙부인 대방공(帶方公) 보(?)와 한안인(韓安仁)ㆍ문공인(文公仁) 등이 역모하였다 하여 50여 명을 처형 또는 유배하였다. 그리고 인종(仁宗)을 강요하여 자신의 셋째 딸과 넷째 딸을 인종의 비로 만들어 권세와 총애를 독차지하였으며, 자기 생일을 인수절(仁壽節)이라 하고 매관매직과 수뢰로 축재하였다. 인종 4년(1126년)에는 군국지사(軍國知事)의 직위를 탐내어 왕의 노여움을 샀으며, 이에 상장군 최탁(崔卓)ㆍ오탁(吳卓)ㆍ대장군 권수(權秀) 등이 거사하여 그를 잡으려 하자 그들을 모두 살해하였다. 이때부터 국사(國事)를 한 손에 쥐고 세도를 부리다가 이듬해 반역을 도모하여 왕비(王妃)를 시켜 수차 왕을 독살하려 하였으나 왕비의 반대로 실패하였고, 왕의 밀명을 받은 척준경(拓俊京)과 병부상서(兵部尙書) 김향(金珦)의 거사로 영광(靈光)에 유배된 후 거기서 죽었다.


▲ (左上) 동국대학교박물관 소장의 탄연(坦然)의 진락공중수청평산문수원기(眞樂公重修淸平山文殊院記) 비편(碑片). (右)국립중앙도서관 소장의 탁본. (左下)개인 소장의 탁첩.

자현(資玄ㆍ1061~1125)은 자연(子淵)의 손자이며 재상(宰相) 의(?)의 아들로 자는 진정(眞靖), 호는 식암(息庵)·청평거사(淸平居士)·희이자(希夷子)이다. 선종 6년(1089년) 문과에 급제, 대악서승(大樂署丞)이 되었으나 곧 사직하였다. 이어 전국의 명산을 유람중 춘천(春川)의 청평산(淸平山)에 들어가 아버지 의(?)가 세운 보현원(普賢院)을 문수원(文殊院)이라 고치고 이곳에서 당(堂)과 암자를 지어 선학(禪學)에 몰두하였다. 예종이 여러 번 불렀으나 사양하고, 예종 12년(1117년) 예종이 남경(南京)에 행차하였을 때 왕과 만나 우대를 받고 왕후와 공주로부터 의복을 받았으며, 인종에게서도 총애를 받았다. 다시 문수원에 들어가 수도 생활로 평생 보냈으며, 청평산에 ‘청평식암(淸平息庵)’이라는 4자의 대해서(大楷書)를 썼다. 시호는 진락(眞樂).


▲ 강원도 춘천시 북산면 청평리에 자리한 진락공(眞樂公) 이자현(李資玄)의 부도탑.

공수(公壽ㆍ?~1137)는 자는 원로(元老), 초명은 수(壽), 자연(子淵)의 동생인 우복야(右僕射) 자상(子祥)의 손자로 아버지는 평장사를 지낸 예(預)이다. 어려서부터 외조부 최유선(崔惟善)의 총애를 받았으며, 처음 문음(門蔭)으로 벼슬길에 나갔으나 선종 3년(1086년) 다시 진사시(進士試)에 응시하여 합격하였다. 이후 궁전고판관(弓箭庫判官)ㆍ직한림원(直翰林院) 등을 역임하다 예종이 태자가 되자 첨사부녹사(詹事府錄事)로 뽑혔다. 서경유수판관(西京留守判官)이 되었을 때 예종이 서경에 행차하였는데, 백성에게 고통을 끼치지 않으면서 왕에 대한 접대를 원만하게 수행하여 임금이 칭찬하였다. 이에 임금이 가마의 수행을 명하였으나, 관례를 들어 사양하였다. 뒤에 예부원외랑ㆍ병부시랑(兵部侍郞)이 되어 14년간 선군(選軍)의 임무를 맡았는데, 공평무사하여 군졸들의 칭송을 받았다.

이후 여러 관직을 거친 후, 인종 2년(1124년) 검교사도 사수공 참지정사(參知政事)를 거쳐 중서시랑 평장사가 되었다. 당시 이공수의 6촌 형제인 이자겸(李資謙)이 정권을 천단하고 있었는데, 인종 4년(1126년) 2월 인종이 내시 김안(金安) 등을 시켜 이자겸을 제거하려 하였다가 실패하였다. 이에 위협을 느낀 인종이 이자겸에게 선위(禪位)하려 하였으나, 그가 적극 제지하였다. 5월에 척준경(拓俊京)과 함께 이자겸을 제거한 공으로 추충위사공신(推忠衛社功臣)의 칭호를 받았고, 인종 6년(1128년) 3월 문하시중이 되었다. 이듬해 판병부사(判兵部事)에 이어 판이부사 감수국사(判吏府事監修國史)를 역임하였다. 인종이 묘청(妙淸)을 총애하자 이를 비판하였고, 4번이나 치사를 청하는 글을 올렸다가 1131년 검교태사 수태부 문하시중 판이부사(檢校太師守太傅門下侍中判吏部事)가 되고 동덕공신(同德功臣)의 칭호를 더 받고 치사하였다. 시호 문충(文忠).

공수(公壽)의 아들 지저(之低ㆍ1092∼1145)는 자는 자고(子固)로 예종 15년(1120년) 문과에 장원급제하고 직한림원(直翰林院)이 되었다. 인종 초에 우정언(右正言)으로 공정한 지론이 재상의 비위에 거슬려 서해도 안찰사로 나갔다. 당시 자겸(資謙)이 국정을 전횡하며 지방관청의 뇌물을 받아들이는 등 악폐가 심하므로 이를 금지시키려다 자겸의 미움을 받아 지평주군사로 좌천되기도 했다. 인종 4년(1126년) 자겸이 제거되자 기거주(起居注)가 되고 도참설로써 인종을 현혹하는 묘청(妙淸)ㆍ백수한(白壽翰) 등을 배척하고, 그들의 서경천도를 적극 반대했다. 1135년 묘청의 난 때는 중서사인(中書舍人)으로서 조정안에 그들과 내통하는 자가 있음을 인종에게 건의하여 문공인(文公仁)ㆍ임경청(林景淸) 등을 파면시켰다. 이듬해 좌승선(左承宣)을 지냈고 1138년 추밀원부사(樞密院副l使)를 거쳐 어사대부ㆍ동지추밀원사로 승진, 그 뒤 예부상서ㆍ정당문학ㆍ판한림원사(判翰林院事) 등을 지냈다. 문장에도 능했으며, 중서시랑 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문정(文正).